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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2 대한민국 화학산업의빛을 밝히다

“한국화학연구소는 우리나라 화학기술의 자립을 지상목표로 하고 단계적으로 기술개발을 성취함으로써 우리 기술수준의 혁신적 향상을 기하고 시설과 기술자료를 구비하는 한편 기술두뇌를 결집시키고 연구개발 의욕을 갖는 업체와 이를 공유하면서 화학기술의 중심지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1977년 1월, 성좌경 한국화학연구소 초대 소장 신년사 중

01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화학산업의 싹을 틔우다

1976년 9월 2일, 국내 최초 화학전문 연구기관으로 설립된 한국화학연구원(당시 한국화학연구소)은 대덕연구단지에 터를 닦고 시설과 연구장비를 도입하는 등 연구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시설과 연구장비를 구축하고, 행정인력과 연구인력 등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총력전이 펼쳐졌다.

1977.03.10 ‘재단법인 한국화학연구소(Korea Research Institute of Chemical Technology)’는 1976년 9월 1일 정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고, 다음날인 9월 2일 대전지방법원에 법인설립등기(제112호)를 완료함으로써 정식 발족했다.

연구소 건설 공사 착공식 테이프 커팅

1978.04.17 화학연은 1976년 10월에 대덕전문연구단지 내 충남 대덕군 탄동면의 장동리와 신성리(현재는 대전광역시로 편입)에 121,700평(당시 가격 217,763,584원)의 대지를 연구소에서 직접 매입해 구체적인 건설계획을 수립했다. 가장 먼저 완공된 건물은 제1호관(현 성좌경관)이다.

1, 2, 3호관이 완공된 모습

1979 연구인력은 연구기관의 핵심요소라는 점에서 우수한 연구요원을 유치하는 일은 설립 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1970년대는 화학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전 분야에 걸쳐 인재가 귀한 시절이었다. 화학연은 먼저 국내 산업계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 국내 산업계의 실정에 정통한 과학기술자를 연구요원으로 유치하는 한편, 성좌경 소장이 미국과 일본의 해외 한국인 과학기술자를 직접 방문, 면담해 해외의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를 연구소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따라 조직 정비, 연구 분야 선정, 연구실 개설, 연구 및 행정지원 업무가 본격적으로 수행되었다.

분석실 (1979년 모습)

1979.05.23 연구원의 확충으로 조직이 정비되면서 분야에 따라 여러 시설, 장비가 확충되었다.
화학연은 설립 초기 연구장비 확보를 위해 미국 피델리티인터내셔널 뱅크(FIB : Fidelity International Bank)로부터 3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들여왔 다. 1977년 10월 7일, FIB와 연구기자재 도입을 위한 차관계약 및 물자공 급계약이 체결됐고, 총 388종 900여 품목을 선정, 1979년 말까지 도입·설 치를 마쳤다. 이처럼 차관과 특별외화대출, 유엔 지원사업 등 으로 필수적인 연구장비를 확보하면서 이전까지 문서작업 위주의 연구에서 실용화 시제품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시설 공개 및 연구발표회

02 국내 화학산업 발전의 기반을 다지다

설립 이후 기관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운영비가 늘어나고 더 이상 민간기업의 출연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자 연구소는 재정자립을 위해 연구수입의 확충에 주력하고 적극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추진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산업계 수탁연구로 연구개발 능력을 키우고 이후 좀 더 안정적인 연구를 위해 정부로부터 연구과제를 받아 연구개발을 수행했다.

1980.03.18 자체연구와 산업계 수탁연구로 연구 기반을 다진 화학연은 1982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특정연구개발사업 추진과 함께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정부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2000년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과학기술 성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국가가 전략적으로 개발해야 할 첨단 산업기술의 개발을 특정연구개발사업으로 추진했다.최규하 대통령, 성좌경 전 과학기술처 장관(연구소 초대 소장)이 연구개발 현장을 방문하고 연구소를 독려했다.

최규하 대통령, 성좌경 전 과학기술처 장관(연구소 초대 소장) 연구소 시찰

1981.02 채영복 전 소장이 KIST 시절 이영길 박사와 함께 작성한 ‘정밀화학공업의 전략산업화 계획안’이다. 화학연 소장 취임 후 이 계획안을 발전시켜 정밀화학공업의 현황과 중장기 비전을 만들었고 이것이 5차 경제개발 계획에 포함돼 시행된다. 이후 1982년 1월, 부가가치가 높은 정밀화학 분야의 연구개발 비중을 늘려 나갔다. 정부도 1973년과 1978년에 2차례의 석유위기를 겪고 난 이후 기술집약적이고 자원을 절약할 수 있는 생산제품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정밀화학 분야를 중점 육성하는 구조고도화 전략을 추진했다. 화학연은 이러한 정부 계획에 맞추어 정밀화학 제품 국산화 연구에 주력했고, 그 결과 정밀화학 제품 분야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정밀화학공업의 전략산업화 계획안

1981.12.11-12 화학연은 정밀화학 부문의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수행했다. 기술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인 정밀화학 제품을 국산화 개발하고 이를 수출하는 것이 목표였다. 정밀화학 부문의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되면서 연구 인력이 늘어났고, 이전까지 주로 소규모의 산업계 수탁연구에 의존하던 연구활동이 크게 확대됐다.

정밀화학 세미나 개최

1982.04.15 화학연은 우리나라 화학산업 정책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석유화학 중심이던 화학산업 구조에서 고부가가치를 올리면서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량이 적은 정밀화학산업 쪽으로 옮겨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국내외 한국과학기술자 춘계학술회의 정밀화학워크숍

(주)삼천리와 함께 1984년 개발한 활성탄을 비롯해 화학연의 대표성과로 구 동양화학공업을 통해 실용화되어 약 1조원의 누적매출액을 달성한‘ 옥시크린’도 정밀화학 연구를 통해 탄생했다.

옥시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