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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살균 마케팅이 만들어낸 화학 혐오증

작성자전체관리자  조회수951 등록일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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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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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살균 마케팅이 만들어낸

화학 혐오증

글 | 이덕환(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과)

글 | 이덕환(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과)

 

 

거의 모든 엘리베이터에 붙여놓은 ‘항균 필름’이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었다. 최근 공개된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따르면 그렇다. 시중에 판매된 30종의 항균 필름 중에서 24시간 이내에 바이러스 억제 효과가 확인된 제품은 8종뿐이었다. 그마저도 2시간을 기다려야만 효과가 나타난다. 항균 필름이 엉터리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질병관리청은 물론이고 화학계도 2년이 넘도록 그런 엉터리 광고를 외면해왔던 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완전히 닮은꼴이었다. 다만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뒤늦게 시작된 살균 광풍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보건·위생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1980년대 후반부터 살균·항균·제균(除菌)·방균(防菌) 기능을 자랑하는 가전제품과 생활화학용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의 보건·위생 환경에 대한 관심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살균에 대한 섣부른 관심이 소비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지나친 살균 광풍이 결국에는 ‘화학 혐오증’(‘케미포비아’가 아니라 ‘케모포비아’가 맞는 표현임)으로 이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인체에 해로운 박테리아(세균)·곰팡이·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살균에는 미생물에게 독성을 나타내는 살생물질이 유용하다. 그러나 무엇이든 차면 넘치는 법이다. 살균을 위한 노력이 오히려 우리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살균에 사용하는 살생물질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이해가 중요하다. 눈앞의 이익만 노리는 비양심적인 기업의 ‘공포 마케팅’이나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음이온을 이용해서 실내 공기를 살균시켜준다는 ‘음이온 공기청정기’가 엉터리 살균 마케팅의 시작이었다. 음이온을 사용하지 않으면 당장 끔찍한 재앙이 닥쳐올 것처럼 법석을 떠는 요란한 광고에 많은 소비자들이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에어컨·냉장고·세탁기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생활화학용품에 음이온 살균 기능이 추가되었다. 살균·항균·제균(除菌)·방균(防菌) 기능이 없는 제품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심지어 그릇·도마·플라스틱·젖병과 내복·벽지·페인트·코팅제도 살균 기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가전제품과 생활화학용품의 살균 기능은 예외 없이 ‘살균제’ 또는 ‘살생물질’을 사용한다. 미생물에게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화학물질은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 포르말린·하이포염소산·페놀처럼 강력한 방부제도 있고, 에탄올·아이오다인팅크과 같은 살균·소독제도 있다. 전통적으로 식품 저장에 사용해 왔던 소금·설탕·아세트산(식초)·에탄올도 살생물질이다. 가공식품의 보존제로 쓰는 레몬산(구연산)·아스코브산(비타민C)·토코페롤(비타민E)·안식향산(벤조산)·소르빈산·살리실산도 상당한 살균력을 가지고 있다. 비누·치약·화장품·물티슈와 같은 생활용품에도 살균력이 있는 보존제를 사용한다. 공기청정기나 에어컨의 음이온은 사실 자외선이나 전기방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오존을 뜻한다. 라돈 침대에서 확인했듯이 방사선을 음이온이라고 포장하기도 했다.

 

제조사가 강요한 ‘살인적’ 사용법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1994년 유공(현 SK케미칼)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인체에 무해한’ 초음파 가습기 전용의 살균·세정제였던 ‘가습기메이트’에서 시작되었다. 무려 17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소비자들이 엉터리 제품의 살인적인 사용법에 노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위험에 대한 경고는 울리지 않았다. 비양심적인 기업의 살인적인 제품에 대해 정부·전문가·소비자들이 모두 넋을 놓아버렸다. 결국 폐섬유증에 의한 28명의 피해자가 확인된 2011년에야 어렵사리 참사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가습기 살균제는 사실 맹물에 가까운 제품이었다. PGH ·PHMG·MIT·CMIT·BKC 등의 범용(汎用) 살균 성분을 넣었다고 하지만, 그 양은 최대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가습기의 세정에 필요한 계면활성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가습기 살균제는 실제로 초음파 가습기의 살균이나 세척에는 어떠한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엉터리 제품이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끔찍한 피해를 남기게 된 것은 ‘살인적’인 사용법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살균·세정제는 작동을 멈춘 가습기를 씻어내고, 맑은 물로 헹구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상식이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비누·샴푸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의 제조사는 달랐다. 소비자들에게 가습기 살균제를 넣은 상태로 가습기를 가동시키도록 요구했다.


결국 제조사가 소비자들에게 밀폐된 실내의 공기 중에 가습기 살균제의 살균성분을 지속적으로 분무(噴霧)시키도록 강요한 것이다. 결국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들은 면역 기능을 기대할 수 없는 호흡기를 통해서 소비자들이 살균성분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흡입하도록 만들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 환경보호청(EPA)는 초음파 가습기에는 수돗물도 사용하지 않도록 권장하고 있다. 수돗물에 잔류하는 염소 소독제와 염류(鹽類)가 실내 공기 중에 분무되어 소비자들의 호흡기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믿을 것이 아니었다. 미생물에게 독성을 나타내는 살생물질은 인체에도 독성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다만 사람은 60조 개에 가까운 엄청난 수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가 세균보다 조금 더 큰 저항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면역력이 가장 약한 폐가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살균도 이성적이어야

소비자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살균 광풍은 하루 빨리 진정시켜야만 한다. 우리의 지나친 살균 시도가 생태계를 불필요하게 교란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더욱이 과도한 살균 노력이 미생물의 내성(耐性)을 키워주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항생제의 남용으로 생기는 ‘슈퍼 박테리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더욱이 지나친 살균이 우리 자신의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치게 청결한 환경에서 키운 아이들에게 아토피와 같은 면역이상증상이 더 자주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살균 기능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비윤리적인 기업의 ‘공포 마케팅’의 부작용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살균 기능’에 넋을 빼앗겨버린 소비자들이 ‘살균제’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값싸고 유용한 ‘보존제’로 활용할 수 있는 PGH·PHMG·MIT·CMIT·BKC와 같은 범용 살균 성분들을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성분’으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치약·화장품·물티슈처럼 수분이 포함된 소비재에 꼭 필요한 보존제로 활용할 살생물질을 아무도 쓸 수 없는 독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소비자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요란한 ‘살균 마케팅’이 만들어낸 황당한 부작용이다.